강남세브란스병원
임준열
2025년 11월,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 사이. 그 유명한 카네기홀(Carnegie Hall) 앞에 섰습니다. 1891년 차이코프스키가 지휘봉을 잡으며 문을 열었고, 비틀즈부터 임윤찬까지 당대 최고의 스타들만 선다는 이 붉은색 공연장의 어떤 점이 이곳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장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카네기홀 앞 WDO 연주 포스터 앞에서의 기념 촬영
저는 이곳에 ‘월드 닥터스 오케스트라(World Doctors Orchestra, 이하 WDO)’의 호른 단원으로 연주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WDO는 전 세계 60여 개국, 약 2,000명의 의사들이 활동하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음악으로 국경을 넘어 치유한다”는 모토 아래, 매번 다른 나라에서 모여 자비로 비행기 표를 끊고 연주하며 수익금은 전액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말하자면 ‘악기를 든 국경 없는 의사회’ 입니다.
이번 뉴욕 일정은 꽤나 강행군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의사들은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직 연습에만 매진했고, 토요일은 고풍스러운 ‘세인트 바돌로매 교회(St. Bartholomew's Church)’, 그리고 일요일은 대망의 ‘카네기홀 스턴 오디토리움’ 무대에 올랐습니다.

금번 WDO 공연 연주 포스터 [좌] St. Bartholomew's Church의 [우] Carnegie hall
특히 이번 공연은 ‘크리에이티브 케어(Creatives Care)’를 위한 자선 연주라 그 의미가 더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정신 건강(Mental Care)을 돕는 비영리 단체인데, 의사들이 음악을 연주해 그 수익으로 예술가들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순환 구조가 참으로 뜻깊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연주하는 악기는 ‘호른(Horn)’ 입니다. 오케스트라 뒤편에 있는, 달팽이처럼 둥글게 말린 금관악기입니다. 부드럽고 따듯한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 오케스트라의 중간 음역을 꽉 채워주는,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허리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금번 WDO 호른 세션 연주자들
이번 뉴욕 연주는 금관악기 연주자인 저에게 모든 것들이 특별했습니다. 지휘를 맡은 조셉 알레시(Joseph Alessi) 선생님 때문입니다. 그는 1985년부터 ‘뉴욕 필하모닉’의 트롬본 수석이자 줄리어드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전설적인 연주자입니다. WDO와는 수년 전 트롬본 협연자로 인연을 맺었다가, 이번에 역사상 최초의 외부 ‘객원 지휘자’로 다시 초청되었습니다.

Joseph Alessi 선생님 지휘 하 함께 모인 첫 리허설 날의 모습
연주 곡목도 카네기홀에 딱 어울리는 ‘미국적인(American Style)’ 곡들이었습니다. 영화로도 유명한 번스타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재즈의 흥이 넘치는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같은 곡들이었죠. 엄숙하고 진지한 클래식이 아니라, 뉴욕의 밤거리처럼 화려하고 리듬감 넘치는 음악들이 130년 된 홀을 가득 채웠습니다.

카네기홀 연주당일 WDO 리허설 중 사진

금번 WDO 연주에 참여한 Korean 연주자분들과 함께

존경하는 Mayo Clinic의 Allen Bishop 선생님과 함께.
1996년 초등학교의 관악단에서 처음 호른을 시작했고, 2006년 세브란스 오케스트라에서 즐거운 대학 생활을 위해 악기를 할 때만 해도 제가 훗날 뉴욕 한복판에서, 그것도 전 세계 의사들과 함께 연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꿈의 무대’에서 호른을 불어보니 하드웨어(Hardware), 즉 음향 시설이나 좌석의 편안함만 놓고 보면 우리 한국의 ‘롯데 콘서트홀’이나 ‘부천아트센터’ 등 최근 지어진 공연장들이 카네기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오히려 음향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축적된 역사’ 와 ‘브랜딩’을 통한 소프트 파워를 키운다면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을 Korea에서도, Asia에서도 행복하게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벽돌과 나무라는 하드웨어 위에 100년 넘게 쌓아 올린 거장들의 스토리, 그 ‘시간의 힘’이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만든 것입니다.

2024년 롯데콘서트홀 WDO 연주 live stream 송출 중 호른 세션 연주 장면

Korean Doctors Orchestra(KDO) 초대 단장이시고, 2026년 Asian Doctors Orchestra
(ADO), Seoul 공연의 조직위원장이신 존경하는 서울의대 조태준 교수님과 2024년 WDO의 부천아트홀 연주 리허설 중 사진. (WDO에는 정형외과 의사 연주자분이 많지 않으나, KDO에는 정형외과 연주자분들이 가장 높은 분포율을 차지하고 있음이 자랑스럽습니다.)
카네기 홀 연주를 마치고 호른을 내려놓으며 문득 이 공간이 주는 울림이 제가 몸담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인 의료기기 분야, 그리고 메디스비(MEDISBY)창업을 통해 걸어가고자 하는 길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기술력, 특히 의료 기술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임상 현장에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를 고민하고, 우리 손으로 필요한 제품을 만들고, 해당 제품의 임상적 뒷받침을 묵묵히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카네기홀이 하루아침에 명소가 된 것이 아니듯, 그 진정성이 시간과 함께 쌓인다면 언젠가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긴 ‘새로운 표준’이 탄생하리라 믿습니다. 뉴욕의 가을밤, 130년의 시간이 깃든 붉은 객석을 바라보며 얻은 이 담담한 용기. 그것이 이번 연주가 저에게 준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